Fashion Essay-4: Pants suit
난 바지 입은 최지우가 좋다.
난 최지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우 최지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야겠다.그녀의 연기는 그닥 내 취향이 아니다. 스크린이나 TV화면 속의 그녀는 대체로 고운 심성을 지닌 여자로 등장한다.어떨 때는 감정의 과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도 운다. 극중 엄청나게 비극적으로 보여지던 그녀의 운명도 맥빠질 정도로 종국에는 강직하고 우직한 남자 주인공 덕분에 해결되버리고 만다. 그렇다. 그녀는 너무 나이브하고 김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시사회나 행사장 혹은 시상식에서 보여주는 그녀는 다르다. 최지우는 드레스 혹은 스커트 일색인 여배우 사이에서 팬츠수트를 입는다. 그래서 돋보인다.
최지우는 균형적인 신체비율과 170센티미터가 넘는 타고난 신체적 장점을 지녔다. 게다가 그녀의 바디라인은 정말 곱다. 그래서 사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가렛 테일러드 팬츠를 입은 최지우는 그 어느 때보다 여배우스럽다. 아찔한 클레비지를 드러내지 않아도 아슬한 백라인 커팅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이지적이고 섹시하다. 아무래도 팬츠 수트의 파워풀한 이미지가 그녀의 기존 이미지, 그러니깐 비련의 여주인공 이미지를 상쇄시켜주면서 도리어 상승효과를 가져와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팬츠수트를 단아하고 정갈하게 입기는 쉬워도 섹시하고 우아하게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 앙겔라 메르켈 그리고 박근혜의 팬츠수트에서 일상복을 넘어선 그 어떠한 미적 쾌감을 느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팬츠수트를 제대로 입기가 아니 엄밀히 말해서 패셔너블하게 입기가 드레스보다 더 어렵고 까다롭다.
여성의 팬츠입기는 여성의 인권신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바지 혹은 두 다리를 오므릴 필요가 없는 이 복장이 여성복에 도입된 것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세계대전으로 남성들이 군대에 가 버리자 버려진 공장과 노점상을 지켜야 했던 여성들이 택했던 작업복은 바지였다. 이렇게 처음에 그녀들은 절실한 이유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이 당시 바지입은 여성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기보다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되어야만 했던 그녀들을 상징했다. 그래서 코코샤넬이 바지정장을 상류계층의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코르셋 이후로 신체적 해방감을 맛본 여성들은 바지를 버리지 않았고 서서히 여권신장과 함께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지를 입은 여성은 세련되기 보다 말괄량이 스러웠고 우아하기보다 전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60년대 입생로랑의 르 스모킹은 기존의 팬츠수트를 둘러싼 이미지 즉 여성성이 제거된 여성의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기존 남성복의 테일러링을 그대로 답사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보디라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르 스모킹은 드레스를 통한 그 어느 노출보다 아찔하고 짜릿한 전율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날렵하게 쭉 뻗은 파워숄더 아래 잘록하게 조여드는 허리선 그리고 다시 타이트한 하이웨스트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팬츠 라인은 여성복에 없던 ‘엣지’ 혹은 ‘각’ 다시 말하면 절도와 힘을 주었다. 그래서 베르제가 “샤넬이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이브 생 로랑은 그녀들에게 힘을 주었다.”라고 설명했는지도 모른다. 80년대 부터 여성들은 기꺼이 다른 성의 파워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기 시작했고 즐기기 시작했다. 지적이고 당찬 여성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또 바지정장이 그런 그녀로 만들었다. 그러니 여성들이 바지를 둘러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담론을 뛰어넘어 온전히 자신의 그것으로 마치 남성이 수트를 입듯이 입기란 어렵단 말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영특한 여성 디자이너 덕분에 팬츠 수트는 그 어느때보다 페미닌하고 내츄럴한 룩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텔라 맥카트니와 셀린의 피비 파일로 덕분이다. 최근 최지우가 셀린의 광고를 그래도 답습한듯 한 룩에서 내가 그토록 감동을 한 것도 이 두 디자이너 덕분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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