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17 February 2011

Fashion essay-3: stiletto heel.


빨간 구두 소녀를 위한 변론.
 
금요일 밤 12시, 그로테스크한 퍼포먼스가 첼시,소호 스트리트에서 펼쳐진다. 하이소프라노톤의 웃음소리, 고함소리,어디선가 새어나오는 일정한 비트사운드 그리고 아찔한 청각적 자극음이 거리를 울린다. 또각또각.그렇다. 밤나들이 나온 여인들이 스틸레토힐로 16비트를 찍는 소리다. 훅하고 지나가는 밤공기에 체취와 함께 알싸한 머스크, 쟈스민, 샌달우드가 묻어 난다. 찬 밤바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노랑,빨강,파랑,초록의 얇은 실크 드레스로 한껏 치장을 했다. 아, 열기는 뜨겁고 몸짓은 관능적이다. 목뒤에서 등허리로 이어지는 물결을 그리는 곡선 그리고 힙에서 아킬레스건 아래로 팽팽한 근육의 긴장감이 흐른다. 한 발자국 옮길 적 마다 보이는 다이나믹한 무릎관절의 동작과 리드미컬한 보폭에 시선이 울렁거린다. 분명, 스틸레토힐을 신은 여자의 몸짓은 플랫슈즈를 신은 그녀들과 다르다. 비현실인데다 더 나아가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조차하다. 
 
이는 흡사 발레리나를 보는 것과 같다. 신체의 모든 근육을 극도의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고 몸을 지탱하는 모든 뼈를 마디마디 열어 중력을 거부한다. 발가락만으로 체중을 지탱하고 발꿈치는 높이 들어 시선은 천상을 향한다. 발레리나는 스스로 인간이 중력을 감당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버리고 온몸을 수직적 긴장감 속으로 밀어넣는다. 지상의 모든 것을 거스르고자 하는 고양된 자세가 마치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영원한 갈망을 연상시킨다. 
 
스틸레토힐도 어쩌면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고안물일지도 모른다. 스틸레토힐은 철저히 아름다움을 위해 존대한다. 인간의 수치스러움을 가려준다거나 추위와 더위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측면은 전혀없다. 판타지의 현실화를 구현하는 오뜨 꾸뛰르 의상마저도 이러한 기능적인 측면이 있지 않는가. 일단, 12센티미터가 넘는 가느다란 철심 위로 온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균형을 잡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위태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스틸레토힐에 익숙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등은 구부정해지며 시선은 당연히 바닥을 향한다. 100미터 정도를 걸으면 발이 부어오르는 것 같고 보도블럭이 원망스러워진다. 500미터 걸으면 발목이 끊어질 것만 같아 택시를 잡을 것인지에 대해 한참 자신과 난상을 벌인다. 하지만 일단 스틸레토 힐을 신는 일에 익숙해지고 나면  발가락에서부터 척추로 타고 올라오는 통증 쯤이야 감내할 수 있다. 속는썹에 마스카라를 하는 것 만큼이나 살인적인 힐 높이는 여자들을 격앙시키는 힘이 있다.
 
스틸레토 힐을 신은 여자들의 몸짓을 관찰해보라. 또각또각하는 소리만큼이나 도도하다.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근육은 평소의 열배쯤은 긴장한다.목뒤뼈에서 꼬리뼈로 이어지는 척추를 최대한 꼿꼿이 하면 자연스럽게 어깨를 펴고 시선은 전방 15미터를 향한다. 그리고 체중을 분산시키는 무릎의 관절 이용법을 체득했으니 그 걸음걸이는 고고하다. 그래서 스틸레토 힐을 신은 여자는 늘 정돈되어 보이면서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 시키는 그런 도도함이 있다. 그러나 분명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아니다. 그래서 몇시간 뒤면 발목을 잘라내고픈 충동이 든다. 늘 무릇 아름다움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니 항시 고통이 수반된다. 그래서 특별한 외출을 하는 여인들로부터 스틸레토힐을 빼앗는 것이 마땅한가. 그렇지 않다. 옳지 않다.빼앗을 수도 없을 뿐더러 빼앗으려 하는 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녀는 늘 아름다워야 하니깐 말이다. 안데르센 동화 속, 발목을 잘라내는 순간까지 끝내 춤을 계속 추었던 소녀를 생각해보라. 그런데 나는 동화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녀가 빨간구두에 눈이 먼 것에 대해 회개할 이유가 전혀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름다워지고자하는 욕망은 인류의 역사 혹은 일상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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