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23 January 2011

Fashion essay-1: white shirt

화이트 셔츠를 입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


셔츠 한 장 입는데 덕목을 요구하다니 지나친 소리라 생각할 수 있다. 어느 패션잡지를 보아도 옷을 구매하는데 독자에게 도덕적 자질을 갖추라는 글은 찾아 볼 수 없다. 뉴욕,런던,밀라노,파리로 이어지는 패션순례를 통한 일종의 예언적 계시를 받아 이를 트렌드라 하여 복음을 전파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올 시즌 이러한 컬러,패턴 그리고 디자인을 여러 디자이너의 런웨이에서 볼 수 있었으니 이는 분명 그대의 스트리트에도 전파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부디 각고의 신체적 단련과 부단한 팔로우 업을 통하여 그대의 존재적 가치와 신실함을 입증하라. 여기에 어떠한 도덕적 자질을 요구하는 말씀은 없다.

그런데 내가 화이트 셔츠를 얘기하는데 도덕적 자질을 논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화이트 셔츠 만큼 클래식하고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패션 아이템이 있는지 말이다. 다시 말하면, 화이트 셔츠는 단순히 패션 아이템을 넘어서서 입는 이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단 말이다.

지중해 대양의 바다내음과 살인적 열기에 흐르는 땀냄새가 훅 하고 지나갈 듯한 알랭 드롱의 화이트 셔츠. 벨 듯한 빳빳한 칼라에 목 아래 첫단추까지 꼭 채워서 팽팽한 긴장감 마저 감도는 칼 라거펠트의 화이트 셔츠. 어깨선과 허리선 어디에서도 결점을 찾을 수 없는 완전무결한 핏을 보여준주는 콜린 퍼스 혹은 톰포드의 화이트 셔츠. 그리고 뉴욕 독신 여성이라면 한 벌 쯤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만들어 낸 다이앤 키튼의 우아하고 지적인 화이트 셔츠.

그러나 화이트 셔츠는 또한 아무나 입는다. 그리고 아무때나 입는다. 하지만 셔츠 한 장 제대로 입기가 그리고 화이트를 제대로 입을 줄 안다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이다.

윈저칼라를 캐주얼 자켓과 입는다거나 3버튼 칼라를 보타이와 매치하는 우를 법하지 말며 탭 칼라의 우아한 멋을 알고 윈저 공에게 감사할 줄 아는 지식이 요청된다.

자신의 얼굴형과 목길이에 적합한 셔츠를 알았다면 그 셔츠에 맞는 자켓을 고르는 법 또한 알아야한다. 물론 넥타이 매는 법도 단연 달라야하고 때로는 넥타이를 하지 않을 경우 단추를 몇 개 정도 푸는 것이 적당한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이트 셔츠는 한 점의 얼룩도 없이 스치면 베일 듯이 빳빳하게 다림질 되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세탁물과 함께 돌려서도 안되고 말릴 시에는 옷걸이에 정갈하게 걸어 말려야한다. 그 후 다림질을 할 때는 칼라에 풀을 먹여 다려야 하고 요크부분은 그 어느 부분보다 신중을 다하여 다려야한다. 시간적 여력 부족하거나 다림질 하는 법을 모른다면 다른 자의 노동력을 사더라도 화이트셔츠는 눈부시도록 새하얗게 그리고 빳빳해야 한다.

그러니 화이트셔츠는 다른 패션 아이템과 달리 고결하고 숭고한 멋이 요구된다. 알랭드롱,칼 라거펠트,콜린 퍼스 그리고 다이앤 키튼의 그 것이 그렇게 새하얗고 구김없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들의 셔츠가 역시 모두 그러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화이트 셔츠에서 백자로부터 발견했을 법한 미학을 느꼈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무리가 아닐 것이다. 화이트 셔츠의 신체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과하지도 보족하지도 않는 핏과 무리없이 목을 감싸는 칼라 그리고 어께에서 소매로 떨어지는 물흐르는 듯한 라인은 백자의 가감없는 실루엣과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목선 그리고 담백하게 몸통에서 받침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담고 있는 그 정신이 닮았다. 정갈함과 담백함을 담아내는 고아하고 담대한 정신이다. 그러니 화이트 셔츠를 제대로 입는다면 단순히 걸치는 차원을 넘어서서 담백하고 정갈한 멋을 살리는 법을 터득해야 하고 스스로 입는 자 역시 이를 담아낼 그릇이 되어야한다. 그래서 내가 디올옴므의 화이트 셔츠를 걸친 날렵한 모델들보다 제레미 아이런스의 화이트 린넨 셔츠에 가슴뛰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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